다조 빌딩 학살 Dajo Building Massacre | ||
![]() | ||
발생 시기 | 1978년 2월 19일 | |
발생 장소 | 콘스탄티노폴 자치구 베르자 구역 다조 빌딩 | |
사건 유형 | 무차별 살상 / 민간인 학살 / 전쟁범죄 | |
가해 세력 | 루이나군 제11기동사단 제2공병연대 루이나군 제5포병여단 제3대대 제3항공여단 소속 AH-1 헬기 부대 | |
공식 명분 | 빌딩 내 은신 중인 무장 저항세력 제거 작전 | |
피해자 구성 | 피난민, 노약자, 여성 및 아동 포함 다수의 비무장 민간인 | |
피해 규모 | 사망 216명 이상, 실종 90명 추산 | |
학살 경위 | 사전 경고 없음 | 루이나군은 대피 경고나 확인 절차 없이 공격 개시 |
집중 포격 | 제5포병여단 소속 곡사포부대가 155mm 고폭탄 18발을 건물 하층부에 집중 사격 | |
헬기 사격 | AH-1 무장헬기 2기가 건물 상층부를 향해 기총과 로켓 사격을 반복 실시 | |
출입구 차단 | 건물의 주요 출입구는 사전에 폐쇄되었으며, 일부 목격자는 철망과 바리케이드 설치를 증언 | |
사후 조치 | 루이나군은 "적 제거 완료" 발표 후 현장 봉쇄, 기자 접근 차단 및 잔해 처리 진행 | |
생존자 증언 | "내 아들이 내 품에서 죽었다. 밖으로 나가려 했지만 문은 용접되어 있었다." | |
국제 반응 | 국제인권감시단 "조직적인 민간인 대학살", 국제 조사단 파견 요구 루이나 정부는 "작전의 정당성"을 강조하며 거부 | |
무장 저항세력 38명 사살. 무기 다수 노획. 아군 피해 없음. 적 제거 완료.루이나군 제11기동사단 발표, 1978년 2월 19일 14시
우리가 용접한 문은 네 개 중 세 개였다. 네 번째 문에는 철망을 쳤다. 그 안에 누가 있는지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전 제2공병연대 징집병 쥘리앙 P. 마르소, 1982년 《라 부아》 인터뷰에서
1. 개요 [편집]
1978년 2월 19일 일요일 새벽, 루이나 점령 하의 콘스탄티노폴 베르자 구역에서 루이나군이 피난민 수용소로 쓰이던 옛 호텔 다조 빌딩을 봉쇄한 뒤 포격과 헬기 사격으로 공격해 민간인 216명 이상이 숨지고 90여 명이 실종된 사건.
루이나군은 빌딩 안에 빌베른계 무장 조직 「신전 수호단」의 대원 40여 명과 무기고가 있다는 첩보를 근거로 작전을 벌였다. 그러나 빌딩 안에 있던 것은 구역 전쟁과 신전 철거로 집을 잃은 빌베른계 피난민 420여 명이었고, 무장 인원은 한 명도 없었다. 작전의 근거가 된 첩보는 검증되지 않은 단일 제보자의 진술을 부풀린 것으로, 뒷날 기밀 해제된 문서에서 조작된 정황이 드러났다. 공병연대는 공격 전날 밤 출입구를 용접하고 철망으로 막았기 때문에 안에 있던 사람들은 빠져나올 수 없었다.
사건은 루이나 본국에 군정이 들어서기 몇 달 전, 민간 정부 말기에 일어났다. 군정 아래에서 1978~1979년 벌어진 「정리 작전」은 구역을 봉쇄한 뒤 한꺼번에 제거하는 다조 빌딩의 방식을 콘스탄티노폴 전역으로 넓힌 것이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정리 작전의 전조로 평가된다.
진상은 1981년 루이나군 철수 이후 생존자 증언과 한 징집병이 몰래 찍은 사진을 통해 드러났다. 그러나 군사법원의 전속 관할과 군 자체 조사의 면책 결론, 공소시효가 겹치면서 처벌받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루이나 정부는 지금까지 공식 사과를 하지 않았다.
루이나군은 빌딩 안에 빌베른계 무장 조직 「신전 수호단」의 대원 40여 명과 무기고가 있다는 첩보를 근거로 작전을 벌였다. 그러나 빌딩 안에 있던 것은 구역 전쟁과 신전 철거로 집을 잃은 빌베른계 피난민 420여 명이었고, 무장 인원은 한 명도 없었다. 작전의 근거가 된 첩보는 검증되지 않은 단일 제보자의 진술을 부풀린 것으로, 뒷날 기밀 해제된 문서에서 조작된 정황이 드러났다. 공병연대는 공격 전날 밤 출입구를 용접하고 철망으로 막았기 때문에 안에 있던 사람들은 빠져나올 수 없었다.
사건은 루이나 본국에 군정이 들어서기 몇 달 전, 민간 정부 말기에 일어났다. 군정 아래에서 1978~1979년 벌어진 「정리 작전」은 구역을 봉쇄한 뒤 한꺼번에 제거하는 다조 빌딩의 방식을 콘스탄티노폴 전역으로 넓힌 것이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정리 작전의 전조로 평가된다.
진상은 1981년 루이나군 철수 이후 생존자 증언과 한 징집병이 몰래 찍은 사진을 통해 드러났다. 그러나 군사법원의 전속 관할과 군 자체 조사의 면책 결론, 공소시효가 겹치면서 처벌받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루이나 정부는 지금까지 공식 사과를 하지 않았다.
2. 명칭 [편집]
사건 당시 루이나군의 공식 작전명은 「베르자 소탕 작전」이었다. 빌베른계 주민들은 사건을 「다조의 일요일」이라고 부르며, 국제 인권단체와 루이나 진보 언론은 1982년 이후 「다조 빌딩 학살」이라는 이름을 써 왔다. 루이나 국방부의 공식 기록에는 지금도 「베르자 구역 교전」으로 남아 있다.
3. 배경 [편집]
3.1. 다조 빌딩 [편집]
다조 빌딩은 조차지 시대인 1912년 옛 루이나 조차지 경계 바로 바깥에 세워진 12층짜리 호텔로, 원래 이름은 「호텔 다조」였다. 해협을 오가는 상인과 외교관들이 묵던 고급 호텔이었으나, 1959년 조차지 회수 이후 국영 숙박시설로 바뀌었다가 1970년대 들어 영업이 끊겼다.
1974년 구역 전쟁이 시작되고 루이나 당국의 신전 정비 작전으로 빌베른계 구역의 신전들이 철거되자, 집과 공동체 시설을 잃은 빌베른계 주민들이 빈 호텔로 모여들었다. 신전이 사라진 뒤 숨어서 지내던 사제들이 피난민들을 조직해 호텔을 수용소로 운영했다. 1978년 초 빌딩에는 420여 명이 살고 있었고, 그 가운데 절반 가까이가 노인과 아이들이었다. 5층의 옛 연회장은 공용어 정책으로 문을 닫은 빌베른계 학교를 대신하는 비밀 교실로, 지하 세탁실은 사제들이 몰래 제사를 올리는 곳으로 쓰였다.
1974년 구역 전쟁이 시작되고 루이나 당국의 신전 정비 작전으로 빌베른계 구역의 신전들이 철거되자, 집과 공동체 시설을 잃은 빌베른계 주민들이 빈 호텔로 모여들었다. 신전이 사라진 뒤 숨어서 지내던 사제들이 피난민들을 조직해 호텔을 수용소로 운영했다. 1978년 초 빌딩에는 420여 명이 살고 있었고, 그 가운데 절반 가까이가 노인과 아이들이었다. 5층의 옛 연회장은 공용어 정책으로 문을 닫은 빌베른계 학교를 대신하는 비밀 교실로, 지하 세탁실은 사제들이 몰래 제사를 올리는 곳으로 쓰였다.
3.2. 베르자 구역 [편집]
베르자 구역은 구시가의 빌베른계 거주지와 옛 조차지의 혼혈계 거주지가 맞닿은 경계 지대다. 구역 전쟁 때 두 구역 사이에 콘크리트 장벽이 세워졌는데, 다조 빌딩은 이 장벽에서 불과 200m 떨어진 빌베른계 쪽에 있었다. 루이나군과 혼혈계 「구역 자경단」은 이 일대를 빌베른계 무장 조직의 침투 경로로 보고 있었다. 사건 당시 베르자 구역은 민정이양위원회 직할 구역이었으며, 1979년 자치정부 헌법에 따라 콘스탄티노폴 자치구에 편입되었다.
3.3. 1978년 초의 콘스탄티노폴 [편집]
1977년 구역 전쟁은 표면적으로 잦아들었고, 특무처의 「더러운 전쟁」도 특무처 폐지와 함께 끝났다. 그러나 루이나 본국의 정치는 혼란에 빠져 있었고, 콘스탄티노폴 주둔군 지휘부는 본국의 철수 여론을 누르기 위해 가시적인 치안 성과를 내라는 압박을 받고 있었다. 1978년 1월에는 루이나군 순찰대가 베르자 구역에서 매복 공격을 받아 병사 3명이 숨진 일이 있었고, 제11기동사단은 이 사건의 배후를 찾는 데 몰두하고 있었다.
4. 경과 [편집]
4.1. 첩보와 작전 승인 (2월 17~18일) [편집]
2월 17일 금요일, 내무부 치안행정국 베르자 분소는 제11기동사단에 첩보 보고서를 보냈다. 보고서는 "다조 빌딩에 신전 수호단 무장대원 40여 명이 은신하고 있으며, 지하에 무기고가 있다. 1월 순찰대 매복의 주범들도 이곳에 있다"고 적었다. 출처는 구역 자경단 소속 제보자 한 명이었고, 보고서에는 교차 확인을 했다는 기록이 없었다.
2월 18일 토요일 오후 제11기동사단 지휘부는 작전을 승인했다. 작전 계획은 야간에 건물을 봉쇄해 도주로를 끊고, 새벽에 포격과 항공 사격으로 건물 안의 「적」을 제거한 뒤 보병이 들어가 소탕하는 순서였다. 건물 안에 민간인이 있는지 확인하는 절차나 대피 경고는 계획에 들어 있지 않았다.
2월 18일 토요일 오후 제11기동사단 지휘부는 작전을 승인했다. 작전 계획은 야간에 건물을 봉쇄해 도주로를 끊고, 새벽에 포격과 항공 사격으로 건물 안의 「적」을 제거한 뒤 보병이 들어가 소탕하는 순서였다. 건물 안에 민간인이 있는지 확인하는 절차나 대피 경고는 계획에 들어 있지 않았다.
4.2. 봉쇄 (2월 18일 밤) [편집]
2월 18일 22시 무렵 제2공병연대 병력이 다조 빌딩을 둘러쌌다. 공병들은 건물의 출입구 네 곳 가운데 세 곳을 용접으로 막고, 나머지 한 곳과 1층 창문에 철망과 바리케이드를 설치했다. 건물에 들어가는 전기와 수도도 끊겼다. 작업 소리를 들은 피난민 몇 명이 창문으로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대답은 없었다.
4.3. 공격 (2월 19일 새벽) [편집]
2월 19일 일요일 05시 40분, 제5포병여단 제3대대의 155mm 곡사포가 사격을 시작했다. 30분 동안 고폭탄 18발이 건물의 1~3층에 집중되었고, 하층부 벽이 무너지면서 1층 로비와 2층 객실에서 자던 사람들 대부분이 숨졌다.
06시 25분부터는 제3항공여단의 AH-1 무장헬기 2기가 건물 상층부를 향해 로켓과 기총 사격을 시작했다. 헬기는 07시 40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사격을 반복했다. 5층 연회장과 7층 사이에서 불이 났고, 연기와 불길은 위층으로 번졌다. 출입구가 막힌 상태에서 사람들은 위층으로 올라가거나 창문으로 뛰어내릴 수밖에 없었다.
살아남은 사람들 대부분은 두 가지 경로로 빠져나왔다. 하나는 지하 세탁실에서 옛 호텔 주방으로 이어지는 배관 통로였고, 다른 하나는 포격으로 무너진 뒤편 벽의 틈이었다. 사제들이 제사를 올리던 지하 세탁실 쪽의 통로를 알고 있던 사람들이 아이들을 먼저 내보냈다.
08시 30분 사격이 멈췄고, 09시 무렵 보병이 건물에 들어가 「소탕」을 벌였다. 생존자들은 이때 건물 안에서 추가 총성이 들렸다고 증언했다.
06시 25분부터는 제3항공여단의 AH-1 무장헬기 2기가 건물 상층부를 향해 로켓과 기총 사격을 시작했다. 헬기는 07시 40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사격을 반복했다. 5층 연회장과 7층 사이에서 불이 났고, 연기와 불길은 위층으로 번졌다. 출입구가 막힌 상태에서 사람들은 위층으로 올라가거나 창문으로 뛰어내릴 수밖에 없었다.
살아남은 사람들 대부분은 두 가지 경로로 빠져나왔다. 하나는 지하 세탁실에서 옛 호텔 주방으로 이어지는 배관 통로였고, 다른 하나는 포격으로 무너진 뒤편 벽의 틈이었다. 사제들이 제사를 올리던 지하 세탁실 쪽의 통로를 알고 있던 사람들이 아이들을 먼저 내보냈다.
08시 30분 사격이 멈췄고, 09시 무렵 보병이 건물에 들어가 「소탕」을 벌였다. 생존자들은 이때 건물 안에서 추가 총성이 들렸다고 증언했다.
4.4. 발표와 봉쇄 (2월 19일 이후) [편집]
19일 14시 제11기동사단은 "무장 저항세력 38명 사살, 무기 다수 노획, 아군 피해 없음, 적 제거 완료"를 발표했다. 이날 오후 기자들에게 공개된 「노획 무기」 사진은 뒷날 루이나군 창고에 있던 무기를 늘어놓고 찍은 것으로 밝혀졌다.
현장은 3월 5일까지 봉쇄되었다. 기자와 국제 구호단체의 접근은 차단되었고, 그 사이 공병연대가 잔해를 치웠다. 수습된 시신 대부분은 유족에게 인도되지 않고 신원 확인 없이 옮겨졌다. 실종자 90여 명의 상당수는 이때 옮겨진 시신일 것으로 추정된다.
현장은 3월 5일까지 봉쇄되었다. 기자와 국제 구호단체의 접근은 차단되었고, 그 사이 공병연대가 잔해를 치웠다. 수습된 시신 대부분은 유족에게 인도되지 않고 신원 확인 없이 옮겨졌다. 실종자 90여 명의 상당수는 이때 옮겨진 시신일 것으로 추정된다.
5. 피해 [편집]
구분 | 규모 |
빌딩 거주자 | 약 420명 |
사망 | 216명 이상 |
실종 | 약 90명 |
생존 | 약 110명 |
무장 인원 | 0명 |
확인된 사망자 216명 가운데 18세 미만이 71명, 60세 이상이 58명이었다. 사망자 명단은 생존자들과 빌베른계 공동체가 1980년대 초 비밀리에 작성한 것으로, 이름을 확인하지 못한 사람은 포함되지 않았다. 생존자 약 110명 가운데 절반 이상이 화상이나 골절 등 중상을 입었다.
사망자 가운데에는 수용소를 운영하던 사제 스피리돈 A. 카라밀로스(61세)가 있었다. 그는 지하 세탁실의 통로로 아이들을 내보낸 뒤 다시 위층으로 올라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5층 비밀 교실에서 아이들에게 빌베른어를 가르치던 교사 마르가리타 트산가리(29세)도 숨졌다. 정보박스의 생존자 증언은 일곱 살 아들 니코스를 잃은 엘레니 파파도풀루(당시 34세)의 말이다.
6. 생존자 증언 [편집]
포탄이 떨어지기 전에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밤새 문 쪽에서 쇠를 지지는 소리가 났으니까. 아버지는 사제님께 물었고, 사제님은 기도하자고 했다.당시 11세로 지하 세탁실 통로를 통해 탈출한 생존자, 1996년 증언
헬기는 세 번 돌아왔다. 두 번째에 불이 붙었고, 세 번째에는 불붙은 층을 향해 쐈다. 그들은 창문에 매달린 우리를 보고 있었다.7층에서 뛰어내려 살아남은 생존자, 1982년 《라 부아》 인터뷰
내 아들이 내 품에서 죽었다. 밖으로 나가려 했지만 문은 용접되어 있었다. 나는 그 뒤로 16년 동안 누구에게도 이 말을 하지 못했다. 말할 수 있는 언어가 없었다.엘레니 파파도풀루, 1994년 빌베른계 공동체 증언집
생존자 증언은 1980년대 초 빌베른계 공동체가 비밀리에 모으기 시작했다. 공용어 정책 아래에서 빌베른어로 증언을 기록하는 것 자체가 처벌 대상이었기 때문에, 초기 증언은 손으로 쓴 공책에 적혀 신전 터와 가정집에 나뉘어 숨겨졌다. 이 공책들은 1994년 『다조의 일요일』이라는 증언집으로 묶여 빌베른에서 출간되었다.
7. 은폐 [편집]
7.1. 군의 공식 기록 [편집]
제11기동사단의 작전 보고서는 사건을 「교전」으로 기록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적이 건물 안에서 먼저 사격해 왔고, 루이나군은 이에 대응해 화력을 동원했다. 사망자는 모두 「적 전투원 및 적과 함께 있던 인원」으로 분류되었다. 1983년 루이나 국방부 자체 조사는 이 보고서를 받아들여 "교전 중 불가피한 민간인 피해가 있었으나 작전 자체는 정당했다"고 결론 내렸다.
7.2. 첩보의 실체 [편집]
2003년 기밀 해제된 치안행정국 문서에서 작전의 근거가 된 첩보의 실체가 드러났다. 제보자는 구역 자경단원 한 명이었고, 제보 내용은 "빌딩에 수상한 사람들이 드나든다"는 수준이었다. 이를 「무장대원 40여 명과 무기고」로 바꾼 것은 베르자 분소의 담당관이었으며, 보고서 초안 여백에는 그의 필체로 "확인 불요, 사단이 원함"이라는 메모가 남아 있었다.
첩보가 왜 부풀려졌는지는 지금도 논쟁거리다. 1월 매복 사건 이후 가시적인 성과를 원했던 사단 지휘부의 압박이 원인이었다는 해석이 가장 일반적이다. 한편 호텔 부지의 옛 소유권을 주장하던 조차지 시대 매판 가문 「열두 집」의 한 가문이 피난민을 몰아내기 위해 제보를 유도했다는 의혹도 있다. 실제로 이 가문은 1983년 자치정부로부터 다조 빌딩 부지를 불하받았으나, 제보와의 연관성은 입증되지 않았다.
첩보가 왜 부풀려졌는지는 지금도 논쟁거리다. 1월 매복 사건 이후 가시적인 성과를 원했던 사단 지휘부의 압박이 원인이었다는 해석이 가장 일반적이다. 한편 호텔 부지의 옛 소유권을 주장하던 조차지 시대 매판 가문 「열두 집」의 한 가문이 피난민을 몰아내기 위해 제보를 유도했다는 의혹도 있다. 실제로 이 가문은 1983년 자치정부로부터 다조 빌딩 부지를 불하받았으나, 제보와의 연관성은 입증되지 않았다.
8. 진상 규명 [편집]
사건 직후 콘스탄티노폴 밖에는 루이나군 발표만 전해졌다. 국제인권감시단은 생존자 몇 명의 증언을 모아 1978년 5월 "조직적인 민간인 대학살"이라는 보고서를 냈고 국제 조사단 파견을 요구했으나, 루이나 정부는 "작전의 정당성"을 강조하며 조사단의 입국을 거부했다. 몇 달 뒤 본국에 군정이 들어서면서 이 문제는 루이나 안에서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전환점은 1982년 5월 13일 루이나 진보 일간지 《라 부아》의 보도였다. 제2공병연대에서 복무한 징집병 쥘리앙 P. 마르소는 봉쇄 작업 당시 소형 카메라로 용접된 출입구와 철망을 찍어 두었고, 전역 뒤 필름을 《라 부아》에 넘겼다. 사진과 함께 실린 그의 인터뷰는 "적과의 교전"이라는 군의 설명을 정면으로 뒤집었다. 루이나군이 철수한 뒤였기 때문에 기자들도 처음으로 현장과 생존자들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1996년 9월 베르자 구역 외곽의 공터에서 97구의 유해가 묻힌 매장지가 발견되었다. 유해 가운데 상당수는 어린이였고, 일부에서는 총상이 확인되었다. 2003년에는 앞서 서술한 치안행정국 문서가 기밀 해제되면서 첩보 조작의 정황이 드러났다.
전환점은 1982년 5월 13일 루이나 진보 일간지 《라 부아》의 보도였다. 제2공병연대에서 복무한 징집병 쥘리앙 P. 마르소는 봉쇄 작업 당시 소형 카메라로 용접된 출입구와 철망을 찍어 두었고, 전역 뒤 필름을 《라 부아》에 넘겼다. 사진과 함께 실린 그의 인터뷰는 "적과의 교전"이라는 군의 설명을 정면으로 뒤집었다. 루이나군이 철수한 뒤였기 때문에 기자들도 처음으로 현장과 생존자들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1996년 9월 베르자 구역 외곽의 공터에서 97구의 유해가 묻힌 매장지가 발견되었다. 유해 가운데 상당수는 어린이였고, 일부에서는 총상이 확인되었다. 2003년에는 앞서 서술한 치안행정국 문서가 기밀 해제되면서 첩보 조작의 정황이 드러났다.
9. 책임 [편집]
진상은 대부분 드러났지만 처벌받은 사람은 없다. 점령지에서 일어난 군 작전은 군사법원의 전속 관할이었고, 군 검찰은 1983년 국방부 자체 조사의 결론을 근거로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1981년 정보기관 조사위원회는 조사 범위가 정보기관에 한정되어 있어 정규군의 작전인 이 사건을 다루지 않았다.
2005년 유족과 생존자들이 사단 지휘부와 치안행정국 담당관을 루이나 법원에 고소했으나, 검찰은 군 검찰의 불기소가 확정된 사건이라는 이유로 각하했다. 2008년 제기된 국가배상 소송도 소멸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기각되었다. 첩보를 부풀린 치안행정국 담당관은 2007년 사망했다.
루이나 정부는 지금까지 공식 사과를 하지 않았다. 국방부의 공식 기록은 여전히 이 사건을 「베르자 구역 교전」으로 적고 있으며, 루이나 정부 관계자가 추모식에 참석한 적도 없다.
2005년 유족과 생존자들이 사단 지휘부와 치안행정국 담당관을 루이나 법원에 고소했으나, 검찰은 군 검찰의 불기소가 확정된 사건이라는 이유로 각하했다. 2008년 제기된 국가배상 소송도 소멸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기각되었다. 첩보를 부풀린 치안행정국 담당관은 2007년 사망했다.
루이나 정부는 지금까지 공식 사과를 하지 않았다. 국방부의 공식 기록은 여전히 이 사건을 「베르자 구역 교전」으로 적고 있으며, 루이나 정부 관계자가 추모식에 참석한 적도 없다.
10. 반응 [편집]
10.1. 루이나 국내 [편집]
1982년 《라 부아》의 보도는 루이나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막 헌정을 회복한 제4공화국 의회에서는 하원 국방위원회가 국방부 장관을 불러 해명을 요구했고, 국방부는 사진이 조작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자체 조사를 약속했다. 그 결과가 1983년의 「작전 정당」 결론이었다.
여론은 갈렸다. 진보 언론과 대학가는 군사법원 관할을 폐지하고 독립 조사를 하라고 요구했지만, 보수 일간지 《르 나시오날》은 마르소를 "전우를 판 자"라고 비난했고, 참전 군인 단체들은 콘스탄티노폴에서 숨진 루이나 병사들을 잊지 말라며 맞섰다. 루이나 안에서 이 사건이 콘스탄티노폴 점령 전체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된 것은 1996년 매장지 발견 이후의 일이다.
여론은 갈렸다. 진보 언론과 대학가는 군사법원 관할을 폐지하고 독립 조사를 하라고 요구했지만, 보수 일간지 《르 나시오날》은 마르소를 "전우를 판 자"라고 비난했고, 참전 군인 단체들은 콘스탄티노폴에서 숨진 루이나 병사들을 잊지 말라며 맞섰다. 루이나 안에서 이 사건이 콘스탄티노폴 점령 전체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된 것은 1996년 매장지 발견 이후의 일이다.
10.2. 빌베른 [편집]
빌베른 정부는 사건 직후 루이나에 항의하고 유엔에 조사를 요구했다. 그러나 니에미이 금융조약 체제 아래 루이나에 재정적으로 묶여 있던 빌베른 정부의 항의는 형식적인 수준에 머물렀다는 평가를 받는다. 빌베른 민간에서는 사건을 계기로 콘스탄티노폴의 빌베른계 동포를 돕는 모금과 피난민 수용 운동이 일어났고, 1994년 증언집 출간도 이 운동의 연장선에 있었다.
10.3. 국제사회 [편집]
국제인권감시단의 1978년 보고서 이후 여러 인권단체가 국제 조사를 요구했고, 1982년 사진 공개 뒤에는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다시 조사단 파견 요구가 나왔다. 루이나는 두 차례 모두 "점령지의 군사 작전은 국내 사법 절차로 다룬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사비에트는 이 사건을 루이나 점령 정책의 잔혹성을 보여 주는 사례로 대외 선전에 활용했다.
11. 영향 [편집]
다조 빌딩의 방식, 곧 구역을 봉쇄하고 확인 없이 화력을 퍼부은 뒤 결과를 「교전」으로 기록하는 방식은 몇 달 뒤 군정 아래에서 벌어진 「정리 작전」에서 콘스탄티노폴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정리 작전 시기 루이나군 내부에서 「다조식 처리」라는 표현이 쓰였다는 증언도 있다.
빌베른계 공동체에게 이 사건은 콘스탄티노폴 민족성 말살의 상징이 되었다. 신전을 잃은 사람들이 모인 피난처가, 사제가 제사를 올리고 교사가 빌베른어를 가르치던 마지막 공간이 한꺼번에 무너졌기 때문이다. 이 사건 이후 베르자 구역의 빌베른계 주민 상당수가 구역을 떠났고, 구역은 사실상 혼혈계 구역으로 넘어갔다.
빌베른계 공동체에게 이 사건은 콘스탄티노폴 민족성 말살의 상징이 되었다. 신전을 잃은 사람들이 모인 피난처가, 사제가 제사를 올리고 교사가 빌베른어를 가르치던 마지막 공간이 한꺼번에 무너졌기 때문이다. 이 사건 이후 베르자 구역의 빌베른계 주민 상당수가 구역을 떠났고, 구역은 사실상 혼혈계 구역으로 넘어갔다.
12. 추모 [편집]
다조 빌딩의 잔해는 불하 이후에도 재건되지 않고 폐허로 남아 있다. 빌베른계 공동체는 해마다 2월 19일 새벽 5시 40분, 포격이 시작된 시각에 빌딩 앞에 모여 희생자 216명의 이름을 빌베른어로 부른다. 추모식에서 이름을 부르는 언어가 빌베른어라는 것 자체가, 이 사건의 희생자들이 무엇 때문에 표적이 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의식으로 여겨진다. 빌딩 외벽에는 생존자들이 새긴 희생자 명판이 붙어 있다.
13. 대중매체에서 [편집]
* 《네 번째 문》(1991, 빌베른): 용접되지 않았던 네 번째 문을 제목으로 삼은 다큐멘터리. 생존자 인터뷰와 마르소의 사진으로 구성되었다. 루이나에서는 2000년대 들어서야 상영되었다.
* 《사제의 길》(2009, 루이나): 지하 통로로 아이들을 내보낸 사제를 모티프로 한 장편소설. 루이나 작가가 빌베른계 생존자들을 인터뷰해 썼다.
* 《일요일 새벽 다섯 시 사십 분》(2017, 콘스탄티노폴): 추모식 시각을 제목으로 삼은 연극. 배우들이 대사의 절반을 빌베른어로 한다.
* 《사제의 길》(2009, 루이나): 지하 통로로 아이들을 내보낸 사제를 모티프로 한 장편소설. 루이나 작가가 빌베른계 생존자들을 인터뷰해 썼다.
* 《일요일 새벽 다섯 시 사십 분》(2017, 콘스탄티노폴): 추모식 시각을 제목으로 삼은 연극. 배우들이 대사의 절반을 빌베른어로 한다.
14. 여담 [편집]
* 마르소가 사진을 찍은 카메라는 입대 전 받은 졸업 선물이었다. 그는 인터뷰에서 "나는 문을 용접한 사람이기도 하다"며, 자신을 증인이 아니라 가해자의 한 사람으로 소개했다.
* 생존자들이 빠져나온 지하 세탁실의 배관 통로는 지금도 남아 있으며, 빌베른계 주민들 사이에서는 「사제의 길」로 불린다.
* 루이나군 발표의 "적 38명 사살"이라는 숫자가 어디서 나왔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 생존자들이 빠져나온 지하 세탁실의 배관 통로는 지금도 남아 있으며, 빌베른계 주민들 사이에서는 「사제의 길」로 불린다.
* 루이나군 발표의 "적 38명 사살"이라는 숫자가 어디서 나왔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